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까지 조선왕조 재정은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이 각각
쌀 100만 석으로 도합 200만 석 규모였다. 여기에 각종 부가세까지 도합
400만 석으로 동세기 국내 총생산의 5% 정도였다고 추정된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지 40주년이 되는 1904년 대한제국 예산은 1,421만원이었다.
이를 추산하면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정부 재정 규모는 18~19세기 전반에 비해
거의 2분의 1 이하로 축소돼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은 천하의 가난한
정부로 추락해 있었다.
국가 재정은 만성적으로 위기였고, 민간에 그 재정위기를 전가하는 정책을 이어갔다.
돈을 찍어 돈을 벌고 무명 잡세를 거둬 적자를 메꾸는 악순환이, 나라가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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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민씨 척족은 복잡한 수술을 통해 신경과 혈관을 이어 붙인 프랑켄슈타인
같았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죽을 수밖에 없는 한 몸이었다.
이 순환시스템이 이들 연합 생명체가 언명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 생명체는
단독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 기형이었다.
그들이 존재하는 곳은 삼면이 바다요. 한 면이 두만강과 압록상으로 막혀 있는
조선 팔도였고, 이들이 빨아먹는 숙주는 조선 백성이었다. 고종은 민씨들에게
권력을 주었고, 민씨들은 그 권력을 휘두르며 조선과 조선 백성으로부터 더 많은
이권을 모아 고종에게 전달했다.
숙주가 생명이 끊기는 순간 기생충 또한 생명이 끊긴다. 그래서 기생충은 숙주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장기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데 고종 민씨
척족은 기생충의 기본 생존 원칙을 무시했다. 한때 조선 팔도를 바꾸는 개혁을
추구했으나 이 또한 권력 강화와 확대 재생산이 목적이었을 뿐, 권력에 도움이
되지 않다고 판단한 순간 개혁을 버리고 백성을 죽을 때까지 수탈해 버리는
야만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리하여 조선 팔도에는 민씨들을 원망하는 소리로 뒤덮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왜 난리가 일어나지 않을까?" 라고 반문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슨 좋은 팔자라고 난리를 볼 수 있겠나?"며 장탄식을 하기도
했다.
이들로 인하여 구한말 조선의 역사는 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조선은 차근차근
저질스럽고 품위 없게 망국의 길을 걸었다.
1905년 미국공사 알렌이 우리나리에 10여 년간 머무르다 귀국할 때 사람들에게
탄식했다.
"한국 국민이 가련하다. 9만 리를 돌아다니고 상하 4000년 역사를 봤지만,
한국 황제와 같은 사람은 처음이다."
- 박종인 저, ‘매국노 고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