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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산의 세상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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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난한 군인들의 반란, 임오군란
작성자 유석산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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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1-04-12 08: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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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73



고종-민씨 연합세력이 스스로 증식해가는 과정에서 첫 제물은 가난한 군인들이었다. 

1882년 6월 왕십리에 살던 구식 군대 하급군인들이 13개월 동안 월급이 밀려 있었다. 

항의 끝에 이들이 수령한 한 달 치 봉미 봉지를 열어보니 봉지 속에는 모래가 들어 있었고 

섞여 있는 쌀은 죄다 썩어 있었다. 군인과 가족들이 창칼을 들고 궁궐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무위소 신설과 함께 대폭 축소된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이었다.


 1881
년 6월 고종은 일본군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를 초빙해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 고종은 이 별기군에게 군복부터 월급까지 특혜를 주며 이들을 

대우했다. 무위영에 대한 고종의 관심은 급속도로 줄어들었고, 이후 구식군대에 대한 

대우는 형편없이 낮아졌다.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낮아진 대우에 하급 구식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별기군은 민씨 세력 실력자였던 민겸호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인 월급을 담당하는 

관청은 선헤청이었고, 선혜청 총책임자는 바로 그 민겸호였다. 이들은 즉각 '왕십리 일동이 

모두 협력하여 늙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입성(入城)했다. 

민겸호는 “주동자를 잡아 포도청에 가두고 그를 곧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군중들은 칼로 

땅을 치며 “굶어 죽으나 법으로 죽으나 마찬가지니 죽일 사람이나 하나 죽여서 원을 씻겠다”

고 고함을 질렀다.


 6
월 9일 수천 명으로 불어난 주민과 군인들이 민겸호 집으로 쳐들어가 순식간에 집을 

부수고 평지로 만들었다. 금은보화를 모조리 태워버렸는데, 비단과 구슬이 타서 불빛은 

오색을 띠고 인삼과 녹용과 사향 등의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풍겼다. 그날 또 다른 민씨 실력자 

민태호를 비롯해 수많은 민씨들 집이 불탔다.


 
폭동 소식을 들은 왕비 민씨는 “무위영 포군을 불러 진륙(殄戮)시키면 뭐가 어렵겠는가"

라고 말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반란 세력은 민비 또한 타도 대상에 포함시켰다.


 6
월 10일 반란군은 창덕궁으로 들어가 민겸호를 죽이고 경기감사 김보현 또한 죽였다. 

민비는 도주했다. 반란군이 끌어들였던 흥선대원군에게 반란군들이 말했다. 


"오직 한 사람만 처단한 뒤 [區一人然後구처일인연후] 모든 민씨들을 다 죽이고 

[盡殺諸閔진살제민] 새 세상을 만들어 함께 태평성대를 만들자."

 

왕비 민씨는 충청도 장호원에 있는 친척 오빠 민응식 집으로 달아났다. 그 사이에 

군사들에 의해 지도자로 추대됐던 흥선대원군은 난 진압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갔다.

 

임오군란을 진압한 부대는 조선군이 아니라 청나라 부대였다. 왜 청나라인가. 

그때 청나라에 출장 중이던 어윤중과 김윤식이 "대원군이 사주한 반란"이라고 판단하고 

이홍장에게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조선에는 이들 무장 반란을 진압할 

군사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반란군이 창덕궁에 난입했을 때, 궁에는 고종이 그리 

애지중지했던 무위영 병력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박종인 저, ‘매국노 고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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