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검색

유석산의 세상노트

자유게시판입니다.

게시판 상세
제목 강남의 탄생 12
작성자 유석산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21-03-05 09:15:16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77




목동 : 강서의 ‘성공한 강남’ 2


화려한 현대 도시 목동에는 당시의 흔적을 알려주는 것이 거의 없다. 철거민들의 

구심점이었던 목동성당조차 1996년 새 성전이 건축되면서 헐렸고 그목동성당조차 

1996년 새 성전이 건축되면서 헐렸고 그 자리에는 고층 주상복합이 들어서 있다. 

그나마 오목교와 양화교 정도만이 남아서 옛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런 엄청난 홍역을 치른 후 목동 개발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앞서 이야기했듯이 목동 개발은 비행기에 탄 외국인들에게 판자촌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실행되어 이렇다 할 ‘개발 이념’이 없었다. 즉 서울시가 주관하는 대규모 주택 

공급 계획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성배 서울시장이 건축가 김수근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김수근은 서울-인천, 즉 경인과 서울 서부 지역의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지만 무계획적으로 팽창하고 있을 뿐 영등포역 외에는 중심축이 

없다고 지적하며, 목동 개발이 좋은 기회이니 중심축 역할을 할 멋진 신도시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누가 들어도 귀가 솔깃할 제안이었고 곧 서울시는 설계안 공모에 

나섰다.

 

13건의 응모안 중 5건이 채택되었고, 김수근은 이 작품들의 아이디어를 묶어 서울시 

직원들과 함께 작업팀을 구성하여 새로운 마스터플랜을 작성했다. 주거 단지 전체에 

대한 계획 설계를 마치자 시범 단지의 성격을 띠는 1단지를 서울건축이 맡아 

설계하였다. 당초 2~6단지는 턴키 방식으로 건설하기로 했는데 기대했던 신공법, 

신기술, 신자재 발굴에 다소 미흡하다는 평가가 내려졌고, 이 때문에 4~14단지는 

1단지처럼 설계와 시공을 분리한 일반 도급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단지에는 다양한 

층수의 아파트와 고급 빌라가 들어섰다. 특히 현관 전면의 장애인용 램프 설치와 아파트 

외장 채색 등은 한국 최초로 시도된 것이었다. 또한 이제는 ‘목동의 명물’이 된 

일방통행로가 단지 전체를 연결했다. 

 

막대한 경비가 투자되어 중심 공동구가 조성되었고, 한국 최초의 열병합발전소가 

건설되었다. 6만 평이 넘는 목동공원과 19만 평이 넘는 신정공원 외에도 5개의 

근린공원, 19개의 아동 공원, 113개의 소규모 어린이놀이터가 들어섰다. 

 

또한 목동에는 강남, 정확히 말하면 잠실의 예를 따라 작은 규모나마 종합운동장과 

아이스링크가 들어섰다. 이 덕분에 신목고등학교가 빙상 명문이 되었다. 목동야구장은 

개장 이후 오랫동안 아마추어 야구 경기가 열리다가 2009년부터는 프로야구단인 

히어로즈가 홈구장으로 사용했지만 올해 고척돔으로 떠났다. 

 

물론 목동에도 당장 지하철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하철 5호선은 완공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급한 대로 2호선 지선이 착공되었는데, 다행히도 신정동에 차량기지가 

계획되어 있었기에 비교적 쉽게 완공되었다. 

 

목동에는 ‘소강남’답게 명문 학교들이 옮겨 갔다. 마침 적당한 학교가 있었다. 

바로 진명여자고등학교와 양정고등학교였다. 진명여고는 청와대에 가는 길목에 있어 

여러모로 불편했고, 양정고는 만리동 고개라는 입지가 발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연히도 두 학교는 고종 황제의 마지막 후궁이자 엄상궁으로 널리 알려진 순헌귀비 

엄씨의 후원 아래 만들어진 남매 학교였다. 때를 맞춘 것처럼 1983년11월에 양정고에 

화재가 발생해 건물 두 동이 전소되는 큰 피해가 났고 이전 계획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서울시는 목동 땅을 내어주고 만리동 학교 부지를 받아 손기정의 올림픽 우승을

기념하는 월계수공원을 조성했고, 양정고는 차액으로 번듯한 새 교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한편 이사 간 진명여고의 새터는 원래 '메밀밭'이었다고 한다.두 학교의 이전 때문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목동도 학원 밀집 지역이 되었다. 비록 강남과 노원에비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이런 식으로 목동, 강남, 노원 세 지역은 비록 소득 수준에 차이가 

있긴하지만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비교적 균질한 집단이 산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적 현상인 학원가와아파트 단지는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병원 유치도 추진되어 이화여대와 한양대 부속병원이 들어올 예정이었으나 한양대 

부속병원의유치는 실현되지 못했다. 또 서부 지역의 핵심이 되기 위해서는 공공 기관의 

대규모 이전이 필요했는데 서울남부지방법원이 문래동에서 이전하고 김포공항이

가깝다는이유로 출입국관리사무소, 국제우체국 등 급이 떨어지는 기관 몇 개가 옮겨 

가는 데그쳤다.

 

그래도 여의도와 가까워서인지 방송과 언론기관들의 유치에는 성공했다. 방송위원회와 

방송진흥원이 21층짜리 회관을 지어 입주했고, 종로구 연건동에 있던 기독교방송도 

사옥을 지어 이사했다. 기독교방송 사옥은 현대 하이페리온이 등장하기 전까지 목동의 

랜드마크였다. 여의도에 개국했던 SBS도 2004년 목동으로 이전했으며, 스포츠조선 등

일부 신문사도 목동행을 택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목동은 '작은 강남'이라는 별명답게 성공한 단지로 평가받는다. 고급 

백화점의대명사 현대백화점이 이곳에 들어갔다는 사실이'성공'을 간접 증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김수근과서울시가 처음에 의도했던 경인-서울 남서부 중심축 기능을 

하는 신도시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최소한 중심축에 해당하는 

부지 규모가 너무 컸다는 비판은 할 수 있다. 

 

사실 목동의 상업 지구는 분양이 순조롭지 못해 1990년말까지만 해도 빈 곳이 많았다. 

주상복합 열풍이 불면서 지금은 69층에 달하는 현대 하이페리온을 비롯한 쟁쟁한 

건설회사의 주상복합들이 빈 자리를순식간에 메워 버렸지만 말이다. 그 때문에 목동이

교통지옥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한종수, 강희용 저, ‘강남의 탄생’에서


첨부파일 다운로드.jpg
비밀번호 수정 및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댓글 수정

비밀번호 :

/ byte

비밀번호 : 확인 취소

댓글 입력
댓글달기 이름 : 비밀번호 : 관리자답변보기

영문 대소문자/숫자/특수문자 중 2가지 이상 조합, 10자~16자

/ byte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

에게만 댓글 작성 권한이 있습니다.




  • NH농협 351-0030-7500-23
  • 예금주 : 김현정(시계나라)
※ 반품보내시기전에 콜센터로 접수하신 후 지정 택배사로 접수해주세요.
택배배송조회
로젠택배(1588-9988)을 통해 배송추적이 가능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