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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산의 세상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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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충과 9재 학당
작성자 유석산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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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0-03-24 08:5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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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297

최충은 고려 문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입니다. 호는 문헌입니다.
984
,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최충은 스무 살이 넘도록 학문 연구에 힘썼습니다.

선비들이 최충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자네는  과거를 보지 않나?"

"나는 과거에 합격하려고 공부하지 않았소. 학자가 되어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오."

최충은 벼슬에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최온이 어느  최충을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반드시 벼슬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라도

 과거를  번쯤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

비로소 최충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22  문과를 보아 장원급제하였습니다.

물론, 최충은 장원을 하였어도 벼슬길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이 있은 뒤에야 최충은 지금까지의 고집을 꺾고 벼슬길에 나갔습니다.

현종은 최충에게 국사 수찬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겼습니다.
최충은 최항, 황주량 등과 역사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실록 편찬은 거란의 3 침입으로 

중단되었다가, 강감찬이 귀주 대첩을 거둔 뒤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실록 편찬 사업은 무려 19년이나 걸려서 최충의 나이 49 때인 1032(덕종 1)에야 완성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7 실록>으로 모두 36권입니다.

벼슬이 자꾸 높아졌던 최충은 50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습니다.

최충은 무엇보다도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덕종에게 북쪽 변방에 성을 쌓으라고 

하였습니다.

덕종은 유소로 하여금 북쪽 변방에 성을 쌓으라고 명했습니다.
유소는 압록강 어귀의 의주 지방에서부터 성을 쌓아 나갔습니다. 이것이 고려 시대에 이루어진 

'천리장성'의 시작이었습니다. 천리 장성은 10년에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최충은 벼슬아치들이 반드시 지켜야  준칙을 마련했습니다.

최층은 한나라의 유향이 지은 <설원>에서 '6 6' 간추렸습니다.

6정은 6종류의 착한 벼슬아치이고, 6사는 6종류의 악한 벼슬아치입니다.
그것을 살펴보면,

①인격이 뛰어난  

②마음이 어진  

③충성스러운  

④슬기로운  

⑤마음이 곧은  

성격이 강한 자가 6정입니다.



6
사는 

①마음이 비뚤어진  

②무능한  

③아부하는  

고자질하는  

⑤간사한  

반역하는 자입니다.

최중은 '6조의 ' 정했습니다. 이것은 법을 어긴 벼슬아치들을 처벌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여섯 가지란 

①권력을 믿고 날뛰는  

②무고한 백성을 괴롭히는 

③상과 벌을 정당하게 행하지 않는  

④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⑤자식들의 출세를 청탁하는  

⑤나라의 재물을 축내거나 훔치는 자입니다.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은 최충은  공으로 형부 상서, 중추사가 되었습니다.

, 정종 때에는 과거를 맡아 보는 고시관인 '지공거' 되어 직접 올바른 관리를 뽑는 일에도 

나섰습니다. 최충은  실록 편찬에 손대어 <현종 실록> 펴냈습니다.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은 최충을 오늘날 국무총리격인 '문하시중' 앉혔습니다.

문종은 유학을 장려하였으므로 학문이 발달했습니다.
최충은 국경 지방이 어수선해지자, 도병사라는 직책도 겸하여 나라 안의 정치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는 책임까지 맡았습니다.
나이 72살이  최충은 너무 늙어서 벼슬을 내놓았습니다.

최충의 집은 개경 송악산 아래 자하동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최충은 사랑방에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가르쳤습니다.  소문을 들은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최충 선생께 글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참된 사람이 되고, 과거에 급제하여 훌륭한 관리가  수가 있다!"

이제 최충의 사랑방만으로는 젊은이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습니다.
최충은 자기 재산을 털어서  학당을 지어 여러 개의 방을 만들었습니다.

  학당에는 9개의 (교실) 있었는데, 낙성재· 대중재· 성명재· 경업재· 조도재·솔성재· 진덕재· 

대화재· 대빙재가 그것입니다.

9재의 가르침은 각각 과목이 달랐습니다.
9
 학당에 입학하면,  처음에는 낙성재에서 , , , , ,수의 육예를 닦습니다.

 다음 차례로  재에서 배워 나가다가 마지막으로 대빙재에서 끝나게 됩니다.
과거에 합격하고도 아직 버슬길에 나가지 않은 선비들이 9 학당의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여기에서 배운 학생들을 가리켜 '최공도' 또는 ‘최충도' 하여 매우 우러렀습니다.
9
 학당의 교육 목적은 인격을 다듬고 덕망을 쌓는  두었습니다. 과거 시험 준비는 

 다음이었습니다.

 9 학당이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 학교입니다.
최충의 9 학당을 본뜬 학당이 여러 곳에 세워졌습니다.  , 개경에서 손꼽히는 학당은 

9 학당을 비롯하여 11개나 되었는데, 이것을 통틀어 12공도' 불렀습니다.

최충에 이어 학교를 세운 사람들은 모두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덕망 높은 유학자들이었습니다.


12
공도로써 고려의 학문은 크게 꽃을 피웠습니다.

<고려사>에는 이런 글귀가 실려 있습니다.

<동방에 학교가 일어난 것은 최충에 의해서이며, 따라서 최충을 '해동 공자'라고 일컬었다.>

최충은 가히 공자와 견줄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 청솔역사교육연구회 저, '이야기 한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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